“그의 생애 전체를 가로지르며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이 사회에 대한, 그리고 자연을 향한 자유의식이다.”
내가 화가 유영국의 존재를 처음 자각적으로 인지한 것은 1995년 가을이다. 그를 만난 것은 일본 시즈오카미술관이 주최하는 <동아시아회화의 근대전>의 출품 교섭을 위한 큐레이터로서 였다. 그때 난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경외심을 지닌 한 작가를 만난 행복감과 더불어 우리 화단을 척박하다고만 여겨왔던 나의 태도가 얼마나 경솔한 것이었는지를 뉘우쳤다. 지난 2002년 11월 11일 저녁, 문안 차 서울대병원 병동에 들렀을 때, 화가 유영국의 시계가 멈추는 것을 나 혼자 지켜보아야 했다. 문득 ‘인문학적 원리로서의 미술사(The History of Art As a Humanistic Discipline)’를 궁리하며 파노프스키가 글머리에 꺼냈던 철학자칸트의 일화가 스쳐지나갔다. 작고하기 며칠 전 심 방 온 의사를 맞아 쇠잔한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그를 향하여 웅얼거렸다던 칸트의 외마디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느낌이 아직 나를 떠나지 않았다.”
올해로 화가 유영국이 작고한 지 10년이 되었다. 그런데 화가 영국의 삶과 예술의 깊이 에 다가서는 일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아니 그보다는 스토리텔링에는 그가 우호적이지 않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수도원의 수사(修士)같은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며 살았으며 평생을 흔한 내러티브 하나 쉽게 허락하지 않는 추상작업으로 일관했다. 그러니 그 사실을 말로 확인하겠다는 일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유영국의 회화적 주제는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생애 전체를 가로지르며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이 사회에 대한, 그리고 자연을 향한 자유의식이다. 출발부터 그렇다. 자유정신은 청년기에 그로 하여금 삶과 예술에 의욕을 지피게 한 불씨였다. 한반도가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군국화되어가던 1935년 봄, 그는 억압적인 식민지 적 현실에 염증을 느껴 다니던 체2고보를 자퇴하고 마도로스를 꿈꾸며 도일(渡日)했다. 하지만 중퇴자로서는 상선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시설을 확인하자마자 스스럼없이 예술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개명한 한 일본인 건축가가 설립한 비교적 자유스러운 학풍의 문화학원에 입학했고 거기서 문학수, 김병기, 이중섭 같은 친구들과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 등 일본인 화가들을 만났다. 적어도 그의 의식 속에서 예술은 그 끝이 닫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대양 육대주를 자유롭게 누비는 항해의 표상과 오버랩되고 있다. 그러한 비전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고보시절 미술교사로서 늘 매력적인 자유인으로 흠모의 대상이던 일본인 화가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로부터 받은 감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그 덕분에 예술이 인간의 존엄성에 이르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음을 여기저기서 밝히고 있으며, 훗날 스승을 기리며 같은 제2고보 출신들인 장욱진, 임완규, 김창억, 이대원, 권옥연 등과 함께 <2•9전>을 개최하고 있다.
유영국 예술의 주제가 자유라는 사실은 데뷔작인 제7회 <독립미술가협회전> 출품작 <랩소디>(1937) 이후 도쿄에서 펼쳐진 그의 청년기 작품들에서 보다 더 실증적으로 확인된다. 향토적 소재주의 담론이나 신일본주의 같은 재현미학이 주류를 이루던 그 시절, 그는 일찍이 버려진 베니어합판이나 나무 조각, 하드보드지, 골판지 등 1차적인 재료들을 작품에 끌어들여 그것들의 물질성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릴리프나 콜라주 작업을 하거나, 아니면 흑색, 회백색, 백색 등 모노톤으로 페인트칠을 하며 과감하게 구축적인 추상을 전위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회화, 삽화, 사진작업 등 그밖에도 그의 형식 실험은 경계 없이 전개된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들은 철저하게 비 대상적이며 엄정하게 기하학적이거나 유기적인 추상성을 드러낸다. 경주 남산을 소재로 한 사진 작업들에서 조차 그러한 추상성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활동 거점 역시 아방가르드적인 <자유미술가협회전>과 문화학원 동문들로 구성된 등 두 그룹전으로 철저히 제한된다. 애초부터 일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며 세속적인 출세를 보장해주던 <조선미전>이나, 일본의 <문전>이나 <제전> 같은 관전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 세계대공황 이후 국수주의로 치닫던 일본이나 나치 독일의 <퇴폐미술전>과 <독일미술대전> 등에서 확인되듯이 전체주의와 식민주의 서사에 함몰되어 추상미술을 반체제 미술로 낙인찍던 당시의 미술계 현실에서 그는 용기 있게 파리에서 열린 <추상-창조(Abstraction-Création전>(1931) 이래 <입체주의와 추상미술(Cubism and Abstract Art)전>(MoMA, 1936), <구축적 미술(Constructive Art)전>(런던, 1937) 등을 미래의 대안으로 읽어내며 영국의 벤 니콜슨, 독일의 장 아르프, 프랑스 작가 장 엘리옹, 소련의 류보프 포보바나 엘 리시츠키 등의 작품들과 조응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전체주의로부터 탈주를 꿈꾸며 두 그룹전을 자유를 향한 만남의 공동체이자 해방구로 삼고 있으며, 갑갑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부정성에 기초한 추상을 예술 의욕과 자유정신이 교차하는 구체적인 삶의 이념이자 전위적인 실천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한 번도 출품을 거른 적이 없는 <자유미술협회전>이 제7회를 맞아 ‘일본민족 노동의 이름다움’이라는 주제를 내걸며 전시(戰時) 동원 체제의 한계를 드러냈을 때, 그는 단호하게 출품을 접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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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유영국은 철두철미하게 모더니스트로서 살았다. 지배와 종속이라는 봉건적인 관습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전체주의적인 폭력성이 여기저기 난무하던 지난 세기에 그는 예술로 식민화된 삶의 조건을 부정하며 초극을 시도하는가하면, 새로운 삶의 비전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러한 화가 유영국에게 그룹운동은 적어도 그가 첫 개인전을 개최하는 1964년 이전까지는 핵심적인 기세였다. 예컨대 관전이 화단을 지배하던 시절 그 풍토를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혁신해내고자 도쿄 시절에는 자유미술가협회와 NBG양화동인을, 귀국 이후에는 신사실파, 50년미술협회, 모던아트협회, 신상회 등을 결성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운동이 빛을 잃었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는 여지없이 해체나 탈퇴를 통해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4•19 혁명기에는 진보적인 미술인들로 구성된 현대미술가연합의 대표를 맡았으며, 5•16 직후의 이른바 ‘개혁국전’으로 불렸던 제10회 <국전>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러한 태도는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대 미대 교수시절인 1950년 미술협회 창립에 나서 당시 학장인 장발로부터 전시 참여와 국립대 교수 사이에 양자택일을 요구받았을 때 그는 거침없이 전시 참여를 선택했으며, 50대에 들어 취임한 홍익대 미대 교수자리도 애초의 약속과 달리 과다하게 작업시간의 희생을 요구받자 3년 만에 내던졌다. 그는 화가로서의 직업적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는 단호했으며, 명예•권력•돈 같은 그것을 훼손하는 어떤 외적 유혹이나 세속적 가치에의 종속도 거부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아침 8시면 어김없이 자리를 주거공간에서 작업실로 옮겼고, 정오가 되면 거기서 나와 점심식사를 했으며, 다시 저녁 6시까지 일하는 기계 같은 엄밀한 습관으로 평생을 화가 노동자로 살았다.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화가로서 ‘잃어버린 10년’을 보냈다지만, 이 시기에는 그는 철저한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어업과 양조업에 종사하며 자신이 꿈꾸던 예술을 위한 경제적인 토대를 일궈냈다. 그 덕분에 그는 환갑이 되던 해인 1975년 열린 다섯 번째 개인전에서야 처음 그림 1점을 팔 정도로 미술시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지만, 자립적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 칠 수 있었다.
그래서 유영국의 삶과 예술세계에는 흔히 현실 부적응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기 일쑤였던 근대기의 화가들에게 따라붙게 마련인 낭만적이고도 문학적인 내러티브나 신비화가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앞에서 예술로 격변하는 시대의 파도를 넘고 자유인을 몸으로 실천해내며 아트 프로페셔널의 한 전형을 근대적인 직업의 하나로서 일구어낸 한 모더니스트의 초상을 만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10주기를 맞은 지금, ‘추상미술의 거장’,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산의 화가’라는 호명에 덧붙여 젊은 시절 그의 데뷔작인 <랩소디>를 그 시원으로 기억하며 유영국의 삶과 예술세계를 “자유정신과 자연을 향한 랩소디”라는 화두로 한 걸음 더 나가서게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