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면과 색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조형 공간요소를 통한 순수성의 모색이었다는 점이다.”
표현대상의 단순화
1940년대에는 유화백의 귀국과 더불어 종전, 해방이라는 시국의 혼란이 있었고 이에 이어 동란을 1950년대 초에 보게 된다. 유동적이고 혼란기의 창작활동은 국내미술계의 맥락을 유지케하는 그룹 전시로 유화백의 활동을 보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동란 이후에 이르러 무르익게 된다. 1950년대의 후반기부터 창작활동의 양상은 초기의 기본적인 조형성을 근거로 삼은 표현대상의 단순화에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이때의 작품은 대상물체를 어떻게 복합적으로 평면화하느냐 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초기에서 보여준 기하학적인 형의 소재로 구조적인 공간을 탐구할 때와는 달리, 대상물체의 자연형태에서 감각적인 제요소를 제거하는 작업인 것이었다. 즉, 대상의 구체성을 기본형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대상의 환경까지 여기에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거리공간축적이 동시에 문제시되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보여지는 공간 내의 여러 물체나 자연요소까지 포함시켜 어떻게 시각적인 거리를 추상화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유화백의 추상미술세계가 이러한 문제를 두고 더듬고 있는 상태를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개념적인 윤곽선이 어느 대상의 형으로 잔영되어 나와있다는 점에서이다.
「창작과정에서 막다를 골목에 이르렀을 때에 나는 항상 뚫고 나갈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작품은 다음 작품을 위한 과정이고 계속적으로 작품을 해야되는 근거가 된다」는 유화백의 작품관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길이 막히면 1년이건 얼마간이건 길을 찾을 때까지 기다립니다」는 그의 자세는 다음 단계를 위한 모색 기간으로 끈질긴 창작을 위한 기나긴 세월이었음을 대변하는 말이다.
1950년대 말까지 자연은 주로 곡선과 직선으로 잡혀지면서 입체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으며 山, 水, 木, 部落등의 형상이 시사적인 선으로 잔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평면과 입체의 공간성을 일원화하는 어려움이 경험되고 있는 상태이다. 사실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이 관념대상으로 될 때, 그 표시는 二元的인 상태에서 나타나게 되며 이때에 구상성을 지니게 된다. 공간의 일원화가 여기서는 추상의 길이 되고 또 그 방법은 형상성을 떠난 순수 기하학적 선이나 색채위주로 된다.
線과 面, 色을 통한 순수성의 모색
자연의 복합적인 조형요소를 어떻게 단일화하느냐에 문제를 두었던 유화백은 여기서 새로운 돌파구를 1960년대에 보여준다. 형태의 잔영을 시사하였던 선은 없어지고 면도 이에 따라 소멸되어진 대신 색채위주의 표현세계로 전환되고 있다. 원색대비를 보여주는 듯한 순수 색조의 등장으로 표현은 깊이와 넓이의 변화를 나타내고 또한 강력한 물감의 흔적은 정적인 색면을 하고 들어오는 화면으로 보여지고 있다. 색채세계에 있어서도 그 특징은 어느 한 개체를 대상으로 삼은 표현이 아니고 항상 대자연을 채색으로 상징하고 있으며 자연에 대한 총괄적인 시안을 채색의 힘으로 추상화하고 있다. 이 시기의 특성은 자연의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을 색채대조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며 또한 동시에 필적의 강도로 대립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색면대립과 색채대조로 분석적인 안목이 아닌 총괄적인 자연공간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서정적 추상이라 할 때 이것은 작가의 정열적인 감성이 색채로 대변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유화백의 작품세계가 크게 자연 그 자체를 두고 표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선과 면과 색으로 보고 이 요소를 단순화시킨다는 회화상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대로, 「단순화는 복합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은 자연의 조형적 성격 및 회화미술의 조형성을 무한히 탐구해야한다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시사하는 것이다. 자연을 어떻게 조형적 공간으로 환원시키느냐 하는 데에 있어서 유화백에게는 주제가 필요 없었고 다만 「한다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믿음에 그의 작가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작품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그 다음 작품을 위한 단계적인 상황인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회화미술을 한다는 바로 그곳에 문제가 있어서 탐구하고 생각하며 일을 한다」라는 말은 유화백의 세계와 길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50년대의 작품세계에서나 또는 1960년대의 작품에 있어서나 동일한 점은 선과 면과 색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조형 공간요소를 통한 순수성의 모색이었다는 점이다.
(중략)
창작세계, 철학과 생활의 상징
앞서 언급된 바도 있지만 유화백이 초기부터 평면과 입체를 일원화하는 추상적 구조를 탐구하고 구현하는 어려움을 부딪쳐왔다고 할 때 거기에는 감성이나 지성이 관련될 수 없었다. 다만 필요한 것이라면 대상에 자율적인 생명을 주어야한다는 문제였으며 이 자율적인 생명은 그의 회화작품에 있어서 초현실적인 또는 일종의 어느 종교적 열정으로서만이 가능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유화백의 예술이 순수감정의 미학으로 주장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되는 것일 것이다.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으며 그냥 작업을 한다. 하다 보니 하루 평균 8시간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여 왔다」는 인내심 있고 끈질기며 창조적 의지가 강한 유화백의 생활은 이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있으며,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을 오로지 다른 생각 않고 열심히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의 200점이 넘는 작품으로 입증되고 있다.
賢人다운 그의 철학과 생활이 있음으로써 흐트러짐 없는 창작세계가 가능했던 바이며 오늘까지의 발전적인 그의 추상작품이 있는 것이다. 「남은 여생은 작품을 계속하면서 보낼 것이고 그 작업은 내가 여지껏 제작한 작품이 옳았는가를 밝혀주는 근거가 되고 또 내 자신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되리라 믿는다」는 유화백의 말을 들을 때, 그는 자신의 작품이 아직도 불충분하다는 간접적인 고백과 동시에 창작생활은 매일매일이 새롭다는 그의 철학을 말해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이같은 작가의 태도와 자세는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며 경건한 자신의 길에 대한 신념이 작가의 창조적인 정신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가의 인격은 창작생활과 정신적 자세로 정해지고 작품은 그 소산이라는 믿음이 여기서 더욱 굳어지는 바이다.
묵묵히 스스로가 택한 길을 충실히 걷고 거기에 만족하는 인생관을 보여준 유화백에게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세파를 타고 동요되는 일 없이 자신의 철학을 확신하고 실천하는 작가로서의 굳은 자세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신념과 인간성으로부터의 표출이 그의 작가세계를 이루어주었고 또 그의 많은 작품은 그가 실천한 철학을 상징해주는 하나하나의 발자취였다고 생각된다. 유영국 화백은 그 세대와 후배에게 무슨 영향을 주었을까? 아마도 작가자신은 이 점에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 스스로가 한 작품을 다음 작품을 위한 절차나 단계라고 믿었던 관계로 미완성 혹은 불충분한 상태의 것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120점의 작품이 전시된 이유를 알아낼 수 있고 또한 이해가 되는 바이다. 지난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120점의 작품은 물론 유화백의 40여년에 걸친 창작활동의 흔적이지만, 사실 그 전체가 한 포기의 그의 작품이고 역작이었다는 사실에서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