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특별전서 RM이 반한 화가… 아내는 심장박동기 단 그를 지켰다

2021.08.26.I조선일보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 2021년 8월 21일


[아무튼, 주말-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 유영국 ‘화가의 生’ 지지한 아내 김기순


전국적으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기증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는 요즘,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대구미술관까지 가서 ‘이건희 컬렉션’을 관람하는 사진이 얼마 전 화제가 됐다. 강렬한 색채 대비를 이루는 두 작품 사이에 서서 벙거지 모자를 쓴 채 작품을 응시하는 RM의 뒷모습. 그와 비슷한 포즈로 사진을 찍은 관객들 모습이 소셜미디어에 넘쳐난다고 한다.

RM이 바라본 작품은 ‘유영국(1916~2002)’의 1970년대 작업이다. 유영국은 김환기와 같은 시대를 산,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로 기록되는 화가다. 1930~1940년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절대추상을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소비되는 ‘현대의 유영국’을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막상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실제로 아무도 추상화를 알아주지 않았고, 화가라는 직업 자체가 도무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갑이 되기 전까지 작품 한 점 팔아본 적 없던 화가,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화가 되기’를 고집했던 화가! 그가 유영국이다.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했을까? 이런 의문으로 화가의 생애를 조사하다 보면, 화가보다 화가의 아내에게 더 관심이 가는 경우가 많다. 비록 시대가 화가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누군가는 반드시 헌신적으로 ‘화가의 생(生)’을 지키는 이가 있게 마련인데, 대부분 그것은 아내의 몫이기 때문이다. 유영국의 아내 김기순 여사를 찾아가 작가 관련 인터뷰를 하다가, 오히려 그녀가 더 궁금해진 이유다.


◇울진에서 양조장 하던 화가 부부
김기순은 192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현재 101세다. 조부는 황해도 봉산의 광산을 소유한 상당한 재력가였는데, 부친 대에 이르러 점차 가세가 기울게 된다. 더구나 오빠 김응렬이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집안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김응렬은 1930년 원산 노련(勞聯) 사건 공판에 이름을 올린 후, 1932년에는 조부가 운영한 봉산 탄광 노동자를 상대로 노동 운동을 벌이다 검거되어 해주로 압송된 사실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던 오빠에 대한 김기순의 회고와 일치한다. 오빠는 어릴 때부터 김기순에게 많은 책을 읽게 했는데, 나쓰메 소세키부터 앙드레 지드, 막심 고리키까지 당시 지식인의 필독서가 모두 포함돼 있었다. 김기순이 시대를 앞선 사상에 개방적이었던 데에는 오빠의 지적 자극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김응렬 부인의 소개로 김기순이 처음 유영국을 만난 것은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극에 달할 무렵이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앞 횡단보도에서 키가 훤칠한 유영국이 웃으며 걸어오는 모습을 김기순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전쟁 통이라 여성도 ‘몸뻬’ 바지를 입어야 하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풀대는 푸른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김기순의 모습을 보고, 유영국은 그녀의 ‘기죽지 않은 자유로움’에 호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들은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유영국의 고향 울진에 정착했다.

울진은 말 그대로 벽촌이었다. 1968년 유명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현장이 유영국 생가에서 가깝다. 그만큼 간첩이 숨어 지내도 모를 깊은 산골과, 몇 미터만 들어가면 한 길 물속이 되는 깊은 동해가 만나는 지점. 그 절묘한 위치에 유영국 본가가 있다. 나중에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숭엄한 자연미’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골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1945년 첫딸을 출산했을 때 김기순은 직접 아이 이름을 ‘리지’라고 지어주었다. ‘마을 리(里)’에 ‘알 지(知).’ 시골 마을에서 자라지만 ‘지적인’ 아이로 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다. 유리지(1945~2013)는 후에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금속공예의 선구자로 성장했다.

울진에서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부부는 양조장을 운영했다. 김기순은 새벽부터 종곡 관리, 양조, 판매 등 대부분을 도맡았다. 이들이 만들었던 소주 ‘망향’은 동해안을 따라 떠도는 어부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해방 전 어부로 살 때도 어획량 순위 1, 2등을 찍어야 직성이 풀렸던 유영국은 양조장 사업도 잘했다. 그러나 1955년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영국은 사업을 모두 타인에게 맡기고 온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다. 번창한 사업을 두고 떠나는 그를 만류하는 친척들에게 유영국이 한 말이 있다. “나는 금산도 싫고 금논도 싫다. 나는 화가가 될 것이다.”


◇팔리지 않는 그림 추상화… 아내는 택시 사업까지 해
결혼할 때부터 김기순은 알고 있었다. 유영국이 화가로 평생 살리라는 것을. 그리고 유영국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말. “내 그림은 나 살아생전 팔리지 않는다!” 어쩌란 말인가. 팔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 뭣 하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일까. 보통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김기순의 생각은 달랐다. “팔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유영국은 서울대 교수도 홍익대 교수도 금방 그만두고, 평생 전업화가로 남았다. 그리고 1964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팔리지 않을 것을 아는 작품’을 전시한 개인전을 거의 매년 열었다. 전업화가에게는 집이 곧 작업실이었기 때문에, 김기순은 평생 조용한 작업 환경을 만들어 주고, 아침 8시, 정오, 저녁 6시 식사 시간에 정확히 맞춰 매일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유영국의 일상을 철저히 지켜내는 일에 집중했다. 남에게 맡긴 양조장 운영이 잘될 리 없고, 개인 양조장 운영이 법적 제약을 받으면서, 생계도 온전히 김기순의 몫이 되어갔다. 그녀는 택시를 하나 사서 기사를 붙여 굴리기도 하고, 버스 노선을 사서 간이운수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네 자녀를 모두 유학 보냈고, 각 분야의 훌륭한 전문가로 키웠다.

유영국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팔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그의 ‘추상화’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눈앞에 보듯 재현하는 회화 개념과는 달리, 선과 색, 면, 형태 등 회화의 기본요소만으로 화면에서 완전한 질서와 균형을 찾아 나가는 작업이다. 유럽에서 몬드리안이 선도한 이 극단적 시도는 1차 세계대전의 카오스를 겪은 지식인들이 어떠한 ‘서사’도 담지 않은, 그래서 ‘비극’의 가능성이 철저하게 배제된 완벽한 ‘조형’을 사회 전 영역에 확장시켜 적용하려는 급진적 운동이었다.

시골 출신의 한국인 화가가 이런 일에 일생을 걸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분명 무모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평생 알아주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림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수할 만큼, 유영국은 스스로 이 일이 가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김기순 여사는 유영국의 그런 ‘태도’에 이끌렸다. 그림이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사람이 하나뿐인 인생을 걸고 그토록 열심히 매진하는 일에는 가치를 둘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만약에 바가지라 하더래두요, 그건 그냥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건 아니죠.” 김기순의 말이다.


◇환갑에 만난 첫 ‘고객’ 이병철
그러나 유영국의 예측은 틀렸다. 살아생전 작품 팔리는 날이 온 것이다. 환갑이 다 되어가던 1970년대 중반, 삼성 이병철 회장이 미술관을 짓겠다고 생존 화가들에게 1점당 100만원씩을 주고 작품을 구매했다. 최순우가 중간 역할을 해서 유영국의 작품이 들어갔을 때, 이병철은 “추상화도 이 정도면 괜찮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원래 고미술을 좋아했던 이병철이 그런 말을 다 했다고, 최순우가 기뻐하며 전해준 얘기다. 당시 미국 유학 가 있던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김기순은 이렇게 썼다. “네 아버지 그림은 막걸리보다 전망이 밝다.”

이병철 회장을 시작으로 삼성가(家)에 그의 작품이 특히 많이 들어갔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에도 그의 유화가 기증되어 현재 양쪽에서 전시 중이다. 유영국은 “나는 예순 살까지는 기초를 좀 해 보고, 이후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 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종종 말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그가 예순 살 무렵 제작된 것이다. 선, 형태, 색채를 하나하나 단계별로 마스터하며, ‘기초 공부’를 해가는 막바지 결과물들이다.

그런데 인생이 참 묘해서, 예순이 되어 공부를 마치고 좀 자유로워지려고 할 무렵, 그래서 긴장의 끈을 약간 느슨하게 하는 순간, 몸이 아프게 된다. 이제는 작품도 팔리기 시작하는데 말이다. 유영국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1977년 심장박동기를 달기 시작했고, 2002년 작고할 때까지 25년간 기나긴 투병 생활과 작업을 병행했다. 여덟 번의 뇌출혈, 서른일곱 번의 입원을 해야 했던 유영국의 고단한 삶을 김기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음은 자명하다.

1977년, 김기순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유영국은 그녀와 함께 영주 부석사로 여행을 갔다. 부석사에서 내려오는 길, 석양에 물든 사과나무를 보고 소품을 하나 그렸다. 이후 줄곧 부부의 안방에 걸려 있던, 유영국 작품 중 그나마 가장 낭만적인(?) 그림이다. 나란히 맞닿아 서 있는 두 그루의 사과나무! 이 사과나무에서 고단하지만 아름답게 생(生)을 영위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 읽힌다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기사 다시보기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8/21/YPQBOASTVBEJDOJT2J3V7PQK7A/?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