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아버지의 지팡이

2022.10.22.I조선일보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그냥 훌쩍 떠나고 싶은 날이 있지만 간이 작아 한 번도 감행을 못 하다가, 그냥 훌쩍 버스에서 내린 일이 최근 있습니다. 401번 버스를 타고 가다 광화문 아닌 안국동에서 내려버린 거지요. 차창 밖으로 출렁이는 코스모스 물결에 홀린 탓입니다. ‘열린 송현’이란 이름으로 얼마 전 시민들에게 개방된 이 공원은 오랜 세월 높디높은 가림막에 가려져 있다가 마침내 속살을 드러낸 건데요, 파란만장한 역사만큼이나 광활한 폐허에 장관을 이룬 꽃들이 행인들 발길을 사로잡았지요. ‘이건희 미술관’ 부지로 결정돼 진작에 유명해진 곳인데, 미술관 공사가 시작되면 다시 폐쇄된다고 하니 겨울이 오기 전 나들이하셔도 좋겠습니다.

땡땡이를 친 김에 공원과 이웃한 서울공예박물관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11월 말까지 하는 ‘사유하는 공예가 유리지’ 특별전 대형 포스터가 보였기 때문이지요. 유리지는 추상화 거장이자 BTS의 RM(김남준)이 사랑해서 더욱 유명해진 화가 유영국의 맏딸인데요, 현대 금속공예의 선구자로 우리 미술사에 기록된 작가이기도 하지요.

물, 바람, 새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과 사파이어, 진주 등을 박아 만든 장신구, 기품 있는 은식기들까지 눈 호강이 그만인데, 저는 딸 유리지가 병든 아버지를 위해 만든 지팡이 앞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1977년 작(作)으로, 그해 유영국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가슴에 심장박동기를 달고 투병을 시작합니다. 대중에게 외면받던 그림이 이제 겨우 팔리기 시작했는데,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온 거지요. 심장박동기를 달고 작업을 하는 아버지를 위해 화류목에 은을 덧대 만든 튼튼하고도 아름다운 지팡이를 보면서, 저는 생전의 아버지에게 지팡이가 되어드린 적 없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유리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고 치유하는 도구로도 공예를 활용했지요. 여덟 번의 뇌출혈, 서른일곱 번의 입원 끝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직접 제작한 상여와 골호, 촛대와 향로가 그것입니다.

<아무튼, 주말>에선 경북 울진 산골에서 태어난 딸에게 ‘리지(里知)’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막걸리 팔던 유영국을 추상화 거장으로 우뚝 서게 한 아내 김기순 이야기를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으로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서로에게 헌신적이었던 이 가족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다면 아래 QR코드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대시면 됩니다. 조선 모바일 앱을 통해 기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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