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교수의 미술사 여백] 한국 추상화의 효시, 동해안 울진의 유영국과 신안안좌 출신 김환기

2023.10.31.I컬처램프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은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추상화가로 손꼽힌다. 1930년대 일본 유학시절부터 유영국은 유럽 모더니즘을 선도한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같은 작가의 기하학적 구성화법을 따랐다. 그 이후 외길로 추상회화를 고집스레 추구했다. 시기별로 화법의 변모가 있지만, 추상작품들을 보면 산 모양의 삼각형을 주축으로 자연의 이미지를 단순화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검은 선의 굵은 윤곽을 치기도 하고, 기하학적 색면을 엄격히 재구성하기도 했다. 거친 터치를 살리거나, 초록색ㆍ붉은색ㆍ노란색ㆍ보라색ㆍ파랑색 등의 채색으로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빛을 표현하기도 했다. 유영국은 산, 바다, 나무, 기와지붕, 해와 달, 황혼 등 고향 울진을 비롯한 한국의 산수를 추상으로 담아냈다.


동해안의 부촌, 울진 유부잣집 셋째 아들

울진은 본디 강원도 땅이었다.  동해안 관동팔경 중 망양정과 월송정을 보유한 명승지로, 조선 시대 문인들에게 유람지역으로 사랑을 받았던 고을이다. 5·16 군사정변 후, 1963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 신라 법흥왕 때 세운 죽변의 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 덕산리 신라고분군 등의 유적이 전한다. 의상대사가 설립했다는 불영사ㆍ대흥사ㆍ신흥사 등과 9세기 후반의 청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98호), 고려의 배잠사지 당간지주 등 불교유적도 적지 않다. 또 월계서원, 명계서원, 노돈서원, 운암서원 등 군에 4곳의 서원이 설립된 것을 보면, 조선시대부터 교육열이 대단했던 것 같다.

울진은 조선 후기부터 어업이 주된 경제적 기반이었지만 남쪽으로 부산, 북쪽으로 강릉과 고성, 서쪽으로 안동과 봉화 등을 연결하는 영동지방 상권의 중심지이자 보부상 집단의 거점이었다. 울진 읍내시장에는 보부상의 조형물이 설치되었고, 십이령에는 보부상 주막촌을 재현해 놓았다. 1919년 3·1운동의 거점 지역이기도 했다.  현재는 동해안과 더불어 덕구와 백암의 온천지구ㆍ불영사 계곡ㆍ성류굴ㆍ자연휴양림 등 생태문화 관광도시로 발전했고, 죽변에 울진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섰다. 옛 풍요가 지금까지 이어져, 울진에 부잣집이 많다고 한다.

유영국 집안은 강릉 유씨로 중국 한나라를 세운 황제 유방(劉邦)의 성씨이다. 유명한 사냥꾼이었던 증조할아버지 유한열이  1840년대 원주에서 이주해 터를 잡았고, 할아버지 유재업이 어업과 수산업, 특히 부산지역과 상거래를 기반으로 경제력을 키웠다. 울진 객사 동쪽의 성곽 망루가 있었던 곳을 뜻하는 말루(抹樓) 마을에, 강릉의 고택을 이전해 부잣집의 위세를 갖추었다.  아버지 유문종(1866~1951)은 독립군자금을 지원하거나 울진제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과 쌍벽으로 일컬어졌다.


유영국은 말루의 대갓집에서 유문종의 4남4녀 중 여섯 번째,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읍내와 바닷가 사이 솔밭 언덕 아래 대숲이 우거진 고가로, 중부지역의 전형인 ‘ㅁ’자 평면구조의 기와집이다. 지금도 큰형 유영준의 아들 ‘유상옥 가옥’으로 등록되어 있고, 흰 진돗개와 함께 그 후손들이 산다.

울진공립보통학교(현 울진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유영국은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일본인 미술교사 사토우 구니오(佐藤九二男)에게 감화되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피카소와 마티스 등 신미술을 가르치며 자유분방한 교사였던 듯, 그에게 반한 화가 제자들이 상당하다. 유영국ㆍ장욱진ㆍ권옥연ㆍ임완규ㆍ김창억 등으로, 2·9동인을 결성해 스승을 기렸을 정도이다.

자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원래 마도로스 뱃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진학에 실패하고 1935년 봄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럽의 추상미술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일본군국주의 체제 아래, 청년미술인들은 다각형으로 쪼갠 화면의 입체파 큐비즘이나 거친 변형의 야수파 포비즘을 비롯해 표현주의ㆍ초현실주의ㆍ추상주의 등 유럽에서 불어온 1910~20년대 전위적 예술형식에 열광했다. 청년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했던 즉, 이들을 주축으로 ‘자유미술가협회전(自由美術家協會展)’이라는 단체가 창립되었다.

유영국은 1930년대 중반 재학시절부터 두터운 종이나 목판 릴리프로 기하학적 도형을 시도하며 추상(抽象)의 세계를 맛보았다. 1937년에는 김환기, 이중섭 등과 함께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회전 때 받은 자유미술가협회상이 유영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작가의 길과 화업(畫業)을 추상미술로 고정한 계기였다.

한국적 모더니즘 길 개척한 추상화의 효시 

유학을 마치고 1943년 귀국한 뒤로는 울진에 머물렀다. 그러다 1948년 김환기의 배려로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교수가 되었고, ‘신사실파(新寫實派)’에 참여하면서부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신사실파는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세 명의 젊은 화가가 결성해, 1948년 첫 전시 이후 세 번의 전람회로 마무리되었다. 해방 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구성된 순수 화가들의 동인이자, 추상미술의 효시인 단체전이었다. 추상적인 선과 점, 그리고 색채로 한국적인 모더니즘(Modernism)을 구축한 이들은 마음으로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새로운 사실, 즉 ‘신사실’이라 표방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과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김환기가 지은 명칭이다.

유영국은 한국전쟁 당시 낙향했을 때에도 이중섭, 장욱진 등을 더 포함해 부산에서 1953년에 가진 제3회 신사실파 전시에 동참하였다. 1, 2회 때와 달리 3회 출품작들의 제목은 <산맥> <나무> <해변에서 A> <해변에서 B> 등이어서 주목된다. 이들은 구상적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화면에 산이 등장하기 시작한 점 때문이다. 이 시절부터 산은 유영국 회화의 브랜드가 되었다.

전쟁 기간 울진 죽변에 터를 잡은 유영국은 어업과 양조장 사업을 벌였다. 집안 선대의 피를 이어받아 사업 감각이 좋았던 듯, ‘망향소주’로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이후 죽변항구에 인접한 읍내 번화가에 자리 잡았다. 당시의 죽변양조장 3층 건물은 리모델링되어 현재는 노래방과 주점이 들어서 있다.

1955년에 다시 상경해 김환기를 따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잠시 역임했다. 서울 북쪽 산세와 한강을 굽어보는 약수동, 우장산 아래 화곡동 등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동시에 서울과 울진을 오가며 사업도 계속했으며, 부자 화가로 소문이 났다. 윤택하고 풍요로웠던 삶이나 건장한 외모를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마인드로 높은 그림 값을 유지시켰던 것 같다. 오로지 국내 굴지의 한 화랑에서만 그림을 유통했고, 1970년대에는 현역작가 중 그림값이 가장 비싸게 매겼을 정도였다.

순수 기하학적 형태의 구성에 산이나 자연의 구상적 이미지를 오버랩한, 유화물감을 두툼하게 바른 유영국의 작업은 한국적 모더니즘의 길을 연 추상화로 평가된다. 초록색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시도한 적색과의 보색대비는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국의 전통 색감이기도 하다.

유영국은 평소 한국적인 것 찾기를 모색하던 미술계 분위기에서 “오래 계속할 수 있는 주제는 산이라 작정하고 그 길에 들어섰지.”라고 피력하곤 했다. 1968년 세 번째 개인전 때 어느 일간지 「산만 그리기 20년 ; 유영국씨」라는 기사에서 “왜 산만을 그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떠난 지 오래된 고향 울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리고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이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산이 내 안에 있다

울진을 뒤져 유영국의 추상화와 유사한 산세를 찾아 나섰다. 2016년 12월 겨울에 이어 지난  8월 무더위에 다시 울진 땅을 밟았다. 울진 통고산의 불영계곡, 남쪽의 백암산 줄기, 북쪽 응봉산 자락의 덕구온천 지역 등 해발 1000m 가량의 높은 산들을 먼저 살폈으나, 바위산 계곡이 깊어 유영국 그림과 유사한 산 모양새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유영국의 추상화 <산> 이미지를 만난 장소는 울진 성류굴 남쪽으로 현종산과 사이, 들과 개울이 어울린 매화면이다. 강릉과 포항을 왕래하던 이곳 매화리 7번 국도에서 전망한 남수산 산세가 유난히 눈에 띈다. 근남면 소재의 남수산(嵐峀山)은 산 이름대로 푸른 연기(嵐)가 바위 구멍(峀)에서 솟는 산이다. 인근의 성류굴과 함께 석회암지대로, 최근 석회광산의 과도한 채굴로 산의 붕괴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조선 초 풍수학의 대가인 남사고(南師古, 1509~1571)의 어릴 적 공부터였다고 전해오며,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탐내서 승려를 파견해 쇠말뚝을 밖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수산은 해발 437.7 m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왕피천의 한 지류인 매화천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누운 들녘의 서쪽 배경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산세가 뚜렷이 드러난다. 남수산은 정삼각형에 근사한 세 개의 봉우리로 연계되어, 오후 햇살을 등지면 실루엣이 아름답다. 산봉우리는 영락없이 유영국의 추상화, 1984년 작 <산>(개인소장)의 삼각형 구성과 똑 닮았다. 


유영국의 산 형상을 작가의 고향 울진에서 만나 반가웠다. 유영국의 예술세계가 어려서부터 늘 보고 살면서 눈에 익은, 내면화된 산을 추상화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어 그랬다. 평생 산을 그리며 유영국은 아예 산을 가슴에 품었던 모양이다. 여주 강천면 걸은리 산 모양 타원형 묘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 화가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의 효시, 서해안의 김환기와 동해안의 유영국

유영국과 김환기는 1930년대 일본 유학 시절 최신의 사조인 추상화를 수용했다. 해방 후 신사실파의 주축을 이룬 두 작가는 한국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의 효시이자, 한국의 색채화가로 우뚝하다. 최근 김환기 점화 추상화 그림이 80억대를 훌쩍 넘어 최고가를 치지만, 미술사적 위상은 쌍벽이랄 만하다. 두 작가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어 흥미롭다.

유영국은 동해와 강원과 경북의 산세를 배경으로 태어나 자랐고, 김환기는 서해바다와 전라도의 들녘을 눈에 담으며 성장했다. 그런 탓인지 유영국의 중심 색은 초록이고 블루의 색감은 동해 바다처럼 투명하다. 반면 김환기의 블루는 갯벌을 품은 서해바다처럼 녹색조나 회색조 등 다채롭고 미묘한 색감을 띤다. 특히 김환기가 고국의 산하를, 친구들을 떠올리며 찍었다는 1970년대의 점화는 블루나 블루그레이로 얇게 마무리되었다.


1950~60년대 김환기가 백자달항아리 같은 조선적 전통에서 한국미를 찾자, 유영국은 산과 자연 풍광에서 한국적 추상미를 추구했다. 초록색ㆍ빨간색ㆍ노란색ㆍ파란색 등 강렬한 유영국 추상화의 색면 대비는 산세가 겹쳐진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특히 산에 주목한 선과 형태, 화면구성이 엄격하면서도 두텁게 색칠한 유화작품에는 우리 땅의 서정이 깊다. 유영국의 색과 형상에는 자연변화가 담겨있고, 사계절의 아침저녁 기후변화가 선명하다.

파리와 서울을 오가다 뉴욕에 정착한 김환기의 추상화가 추억의 색상이라면, 유영국의 화면에는 한국의 산하를 밟으며 마음에 담은 현실감이 오롯하다. ▣

* 이태호, 「명작의 공간 136 한국 추상미술의 효시 유영국의 고향-경북 울진」-‘눈앞’에 있는 산을 떼어다 ‘가슴’에 품고...평생을 그리다, 문화일보 2018. 10. 5. , 《이건희컬렉션 한국근현대미술 특별전: 만남》도록(전남도립미술관, 2023)에 실음.(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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