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부터 ‘달 착륙’까지···‘마름모꼴’과 ‘원’에서 미래를 보다

2023.12.06.I경향신문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 화가 김환기,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와 윤형근, 시인 이상, 건축가 김수근을 한 데 묶을 수 있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답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에서 찾을 수 있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점과 선, 원과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와 원색의 색채,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회화의 사조다. 서구에서는 몬드리안, 칸딘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작가를 필두로 20세기 현대미술의 주요 경향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에선 표현주의적 추상인 엥포르멜, 한국적 추상으로 여겨지는 단색화에 밀려 주변부에 머물렀다. 하지만 1920~1930년대 근대기에 등장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은 1960~1970년대 전성기를 맞으며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후 단색화와 민중미술로 한국 미술계의 구도가 짜이면서 기하학적 추상 시대는 저물었다.

“장식적이거나 서구적 냄새가 난다고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 작품들의 숨은 의미를 복원해 전시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지난달 15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47인의 작품 105점을 통해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추상미술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당시 급변하는 사회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화가들을 고무시켰으며, 당시 발달하기 시작한 건축과 디자인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을 이어갔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사건은 화가들에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열었다. 또한 작가들은 산과 달, 단청과 같은 한국적 요소를 반영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 작품들은 시대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동시에 서구 양식을 답습하지 않고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핵·원자·우주…현실적인 기하학적 추상

1920~1930년대 경성에서 기하학적 추상은 새로움과 혁신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한국 최초의 기하학적 추상회화 작품인 김환기의 ‘론도’(1938)와 유영국의 ‘작품 LA-101’(1938) 등에서 그 태동을 볼 수 있다. 나란히 전시된 작품이지만, 당시 김환기는 유영국의 작품을 두고 “실내장식과 같은 극히 유행적인 무내용한 것”이라고 혹평했다. 당시 기하학적 추상이 영화 주보나 잡지 표지, 다방이나 백화점의 인테리어 등 디자인 영역에서 소비되던 경성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자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순수미술과 디자인 사이의 위계를 구분하는 경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평가다. 김환기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적 추상은 ‘모던 보이·모던 걸’에게 배포되던 영화 주보에 등장하며 근대적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세련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전시에선 1930년대 단성사와 조선극장에서 제작한 ‘단성주보’ ‘조극주보’의 표지뿐 아니라 ‘신동아’와 같은 종합지의 표지에 나타난 기하학적 디자인을 볼 수 있다.

시인 이상도 기하학적 추상의 흐름에 뛰어들었다. 기하학적 디자인이 돋보이는 잡지 ‘중성’(1929), ‘조선과 건축’(1930) 표지를 디자인했고, 미쓰코시 백화점의 기하학적 구조를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건축무한육면각체’)과 같은 문장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기하학적 추상은 전방위로 확산됐다. 윤형근의 ‘69-E8’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으로 작가의 작업실 한쪽에 보관돼 있었다.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으로, 노랑·빨강·파랑 원색의 색채와 화면을 기하학적으로 삼분할한 것이 눈길을 끈다. 청다색의 어두운 색조에 기반한 표현적 추상 작품으로 나아가기 전에 선보인 작품이다. 단색화로 유명한 박서보가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유전질’ 연작도 볼 수 있다. 오방색과 한국의 전통적 패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가들은 기하학적 추상을 매개로 건축가, 디자이너와 연계해 활동했다. 건축가 김수근, 이상순 등과 김창열, 박서보, 하종현 등 화가 22명은 ‘한국조형작가회의’를 1967년 창립했다. 이듬해엔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열려 미술가·건축가·디자이너가 기하학적 조형과 원색의 색조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국가 발전을 상징하는 미래적 이미지로 쓰인 것이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미술가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었다. 50년 만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이승조의 ‘핵 G-999’(1970)는 금속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작품이다. 핵발전을 동력으로 산업화를 이룬 한국 사회 상황과 연관해 해석되는데, 작가 자신은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 발사를 계기로 우주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작업의 출발점이었다고 언급했다. 변영원 또한 원자론에서 영감을 얻어 원을 기본 단위로 한 추상미술을 선보였다. 이성자가 1970년대 말부터 선보인 ‘극지로 가는 길’ 연작은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하늘을 그려내며 우주로 시야를 확대한다.

■산과 달…한국적인 기하학적 추상

전시에선 산과 달, 단청의 무늬 등을 그린 한국적 기하학적 추상작품들의 다채로운 면모를 볼 수 있다. 김환기, 유영국 등 1세대 추상미술가들은 그림이란 사람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라는 ‘문인화적 전통’을 바탕으로 미술에 입문한 세대였다. 김환기의 추상은 산, 달, 새, 나무 등 자연의 형태가 점과 선, 색면이라는 조형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었다. 전시에선 김환기의 ‘달 두 개’(1961), ‘새벽 #3’(1964~65)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유영국의 ‘산’ 시리즈는 빨강, 노랑, 파랑 등 삼원색과 점·선·면의 기본적 조형요소를 이용해 자연 풍경을 추상화해 선보인다. 전성우는 불교 만다라의 기하학적 조형과 한국의 전통적 색감인 색동을 연계한 ‘색동만다라’(1968)를 선보인다. 기하학적 형태에 기반하면서도 물감이 흘러내리거나 번지는 등의 표현적 요소를 사용해 눈길을 끈다.

김 관장은 “이번 전시가 한국 추상미술의 진면목과 다양성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한국 미술의 줄기를 더 풍성하게 키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5월19일까지.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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