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의 길

  • 작가
  • 오광수

“그의 추상에의 길은 그에게 지워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없었다면, 그의 결단과 치열한 의식의 전개가 없었다면 한국 추상미술은, 한국미술의 모더니즘은 어떻게 되었을까.”



예술가는 대체로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천재성과 노력형이 있는가하면,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지닌 예술가와 청교도적인 삶의 행적을 지닌 예술가가 있다. 이중섭이 천재형에 속한다면 박수근은 노력형의 대표적인 경우로 꼽을 수 있다.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지닌 대표적인 예술가로 고흐를 드는 데 이의를 제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생에게 심한 굴곡 없이 금욕적인 삶을 산 예술가로는 동시대의 세잔을 떠올리게 한다.

이 대비적인 타임에 적용시킨다면 유영국은 청교도적인 삶을 산 세잔에 비견할 수 있을 듯하다. 비교적 굴곡이 심한 생애를 기록한 김환기를 대비적으로 생각 할 수 있다. 김환기와 유영국은 동시대의 작가로 비교적 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김환기가 비록 파란만장한 삶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변화로 정찰되어 있는 반면, 유영국은 비교적 굴곡이 심하지 않은 삶을 영위 했다고 할 수 있다. 김환기가 전남 천안 안좌도(가좌도)에서 서울로 진출하고, 다시 동경에 건너가 미술 수업을 받는다. 서울로 다시 돌아와 피난시절(부산)을 겪고 상경, 곧 도불하여 3년을 파리에 체재한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뉴욕으로 건너가 여기서 작고 할 때 까지 정착하게 된다. 한 곳에서 안주한 것이 뉴욕 10년을 제외하면 3년을 주기로 이주를 거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하면 유영국은 고향 울진에서 상경, 그리고 도일하여 수업기와 데뷔기를 거친 후 귀국, 울진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한 비교적 안정된 행적을 나타내고 있다.

김환기가 이상주의적 성향을 띤다면 유영국은 보다 현실적인 성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이중섭이 이상주의적 타입이라고 한다면 박수근이 현실주의적 타입이라고 할 수 있듯이 말이다. 유영국이 가족들을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전력투구한 것은 박수근이 가족들을 위해 피엑스에서 온갖 수모를 마다하지 않고 미국들의 초상을 그린 사례와 닮은 점이 있다. 생애 전체가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고흐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생애를 걸쳐 이렇다 할 스캔들 없이 오직 자신의 예술에 전체를 던진 세잔은 미술가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에겐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한 편이다.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지닌 이중섭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소처럼 자신의 삶을 영위한 박수근은 그렇게 회차되지 않는다. 김환기기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반면 유영국은 여전히 일반에게는 생소한 편이다.

예술가들을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고흐는 고흐의 세계가 있고 세잔은 세잔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이들의 위상은 때로 비교되어 서술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들이 각기 독자의 세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들이 미술사란 맥락 속에서 어떤 위치, 어떤 영향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우열이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흐가 폭발하는 감성의 세계를 통한 회화에 있어서 표현의 문제를 제기해준 반면 세잔은 자연을 보는 시각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줌으로써 20세기 미술의 장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비교가 되고 있다. 세잔을 현대 회화의 아버지로 지칭하는 점에서야말로 누구도 이에 비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김환기가 많은 변화로 자신의 예술을 이끌어간 반면, 유영국은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일관된 자기 세계를 지탱해나갔다. 김환기가 유연한 반면 유영국은 완강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환기가 시대에 민감한 반면, 유영국은 시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편이었다. 이들은 동지적인 유대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동시에 끊임없는 라이벌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데뷔했으나 조형이념 면에서나 작화의 태도에 있어선 대비적이다. 김환기가 유화, 과슈, 오브제, 드로잉 등 폭넓은 매재(媒材)의 확대를 보여주는 데 비해 유영국은 초기의 실험작을 제외하면 유화만을 고집하였다. 김환기는 드로잉을 많이 남긴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영국은 극히 제한된 수의 드로잉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작화의 다름에서 기인된 것이다. 드로잉이 많다는 것은 제작의 준비과정이 많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 드로잉이 적다는 것은 본격적인 제작 속에 드로잉의 과정을 수렴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편이 바람직한가는 역시 비교의 차원이 될 수 없다. 체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출발도 닮은 듯하면서 전연 다른 이념에 지지되고 있다.

유영국은 1916년 강원도 울진(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4남 4녀의 8남매 중 여섯 번째이며 남자 형제 중에선 셋째다. 위로 두 형제와 세 누나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과 누이가 있었다. 고향 울진은 그가 태어날 때 강원도였지만 나중에 경북으로 편입되어 경북 울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력서에 반드시 강원도 울진이라고 적었으며 자신은 경상도 사람이 아니라 강원도 사람이라고 말했다. 경상도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고 바로 경상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유영국의 순수하면서도 완고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면이 있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길도 이 순수하고도 완고한 기질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미술에의 길은 대단히 단호한 결정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제2고보(현 경복중고)에 입학하였다. 미술반에 들어가진 않았으나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35년, 그러니까 고보를 4년 수료(5년제)하고는 19세의 나이로 도일하여 바로 문화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문화학원은 문부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예술대학으로 유영국이 여기를 택한 것은 교복이 없는, 그야말로 예술적인 분위기에 끌렸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 선배로는 박선규가 있었고 동기로는 이철, 김병기, 한중건, 후배로는 문학수, 그리고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이리로 옮겨온 이중섭이 한해 아래였다.

제2고보를 채 마치기도 전에 도일한 점, 그리고 한국인들이 많이 다니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나 관립으로 유명한 동경 미술학교를 지망하지 않고 특이하다는 문화학원을 택한 점, 이 단호한 결정들이 그의 데뷔와 작가로서의 일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남들이 하지 않는, 보다 자유로운 자기 길을 대담하게 밀고 나간 점, 그것은 그를 가장 독자적인 예술의 길을 열어준 것이 되었다. 여기서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의 출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추상에의 길은 그에게 지워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없었다면, 그의 결단과 치열한 의식의 전개가 없었다면 한국 추상미술은, 한국미술의 모더니즘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환기와 이규상이 있었고 구본웅, 문학수, 이중섭이 있었지만 그의 빈자리는 좀처럼 메꾸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추구한 창조의 길, 저 절대한 추상의 길은 영영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의 존재는, 그의 출현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일본에 유학 했을 때, 30년대 중반은 이미 우리의 서양화가 습작 단계를 거쳐 바야흐로 개성의 시대, 조형이념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던 무렵이기도 하다. 인상파를 지나 후기인상파에서 입체, 야수, 표현, 미래, 구성과 마지막을 장식한 추상미술을 수용할 즈음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미술가들이 그것을 옆에서 지켜볼 뿐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 운동의 중심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을 때, 유영국은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하던 추상 운동의 중심에 뛰어들어 그것을 통한 자신의 길을 모색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모더니즘은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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