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한 전형: 유영국, 1996

  • 작가
  • 이일

“그는 동세대의 화가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자신의 추상회화를 고수한 이례적인 화가이다. 그가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조형세계를 시류에 결코 영합함이 없이 일관성 있게 추구해왔다는 사실이 또한 그의 확고한 조형의지를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1. 동년배의 거의 모든 우리나라 작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영국의 초기 작품 활동 역시 일제 치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대적으로는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에 걸친 시기로 그의 나이 20대 때의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로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영국이 애초부터 추상화가로서 화단에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그의 추상을 시종일관 추구해 가거니와, 이는 한국 근현대미술에 있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한편 60년대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전반적인 추세를 돌이켜 볼 때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이른바 앵포르멜 시대로 간주되고 있다. 50년대 말 경에서 60년대 후반에 걸친 우리나라에서의 이 집단적인 추상미술 운동은 전후(2차 대전) 프랑스에서의 앵포르멜 운동과 미국의 액션 페인팅의 때늦은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 최초의 이 표현주의적 추상은 그 일차적 특성으로서 화면으로부터의 일체의 조형적, 구성적 요소의 배제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마티에르의 중시와 화면과의 ‘신체적’인 맞부딕침(‘액션’)이 ‘회화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그 마티에르와 화면에 직접 도입된 행위의 궤적이 당시의 추상회화의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60년대가 저물어 갈 무렵 우리나라의 이 ‘앵포르멜 열풍’도 일종의 포화상태를 맞이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 열풍이 애초의 생명력을 잃고 공허한 매너리즘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하거니와, 동시에 공허한 행위의 되풀이에 대신하여 보다 기본적인 조형언어의 재정립이라는 과제가 새롭게 제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도 서서히 탈 표현주의적 추상이 태동하기 시작하여,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드 엣지 스타일의 기하학적 추상,또 한편으로는 관조적 성향의 서정적 추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전후 세대의 움직임과 견주어 볼 때, 유영국은 세대차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그 세대의 움직임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일 60년대의 유영국의 추상이 앞서 지적한 바, 표현주의적 성향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결코 앵포르멜이나 액션 페인팅 등과 같은 범주의 것은 아니다. 그의 추상은 오히려 액션 페인팅과 때를 같이 한 뉴욕의 ‘색면파’ 추상과의 그 어떤 친근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으며 또 실제로 이 유파의 추상회화를 두고 아예 ‘논-액션(non action)’이라는 말을 쓰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화면 전체가 그 명칭 그대로 폭넓고 망망한 색면(color-field)으로 물들고 있으며 그 색면 자체에 의해 화면이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서의 조형적 균형이 깔려 있으며 동시에 색채는 (대개의 경우 모노크롬 성향의 것이기는 하나)또한 그 자체로서 충만한 내재적 표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이 색면파 추상과 함께 조형성과 표현성의 ‘동화(同化)’를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유영국의 ‘색면’을 놓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물론 이 뉴욕파와의 여러 가지 면에서의 차이점을 전체로 하고서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의 색면파가 그 표현성을 평면적이자 기하학적 패턴의 색면구성을 통해 내세우고 있는 데 반하여 유영국의 회화에 있어서는 애초부터 비기하학적인 색면으로 화면이 메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색채의 경우, 모노크롬이 아니라 원색의 다이나믹한 대비로 화면이 구성되고 있으며, 만일 그의 회화에서 그 어떤 ‘구성’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과 면 그리고 색채 상호간의 연관성에 의해 거의 자생적으로 조성되는 구성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영국의 추상세계에서 여전히 색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새삼 되풀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색채가 ‘표현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의 색채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첫째는 모든 표현주의적 회화가 그러하듯 색채를 모든 재현적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요, 그 두 번째는 색채를 형태의 예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이다. 유영국의 경우는 아마도 두 번째의 표현성에 보다 더 비중을 두고 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며, 이때의 그 색채는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곧 내면적인 빛으로 물들여진 색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유영국의 회화세계가 70년대에 가까워지면서 또 하나의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전환은 굳이 말해서 조형적 차원의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 이전의 표현적인 성향이 가능한 억제되고 기하학적 기본 형태와 그것에 의거한 엄격한 구성이 화면을 지배함과 동시에 그 당연한 결과로서 색채가 이에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색면 자체가 형태 내지는 선에 의해 규정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산’이라는 자연의 이미지가 조형적 모티프로서 화면에 재등장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하나의 역설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하학주의는 무엇보다도 순수조형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3. 이제 화가 자신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내가 대상으로 한 것은 자연이었고, 그것을 탐구해온 형태는 비구상을 바탕으로 한, 즉 추상이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물로서의 자연이 아니고 선이나 면이나 색채 그리고 그런 선과 면과 색채들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서의 자연이다. 화가가 자신이 보고 느끼고 나서 생각하는 자연, 그것은 단순히 보이는 구체적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그런 자연의 형태를 떠나서 선과 면과 색채로써 화면(캔버스)에 더 주관적으로 탐구되는 나의 자연, 나의 자연 형태에의 탐구이다. 나의 선이나 면이 놓이는 자리를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다. 어떤 때는 직선이나 직선적인 면이 추구도 되고 어떤 때는 두터운 색면의 질감도 탐구하게 되며, 또 어떤 때는 더 기하학적인 색면이나 선과 형태들이 되기도 한다. 그런 공부를 60세까지 해온 셈이다.” (이흥우, 유영국-원숙의 서정성, 화랑, 1980, 여름호)
좀 긴 인용문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소중한 증언이라 생각되기에 무릅쓰고 옮겨 놓았다. 유영국은 물론 이론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 어떤 부연설명도 필요 없는 확고한 신념의 표명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한마디로 간추리자면 자연의 근원적 구조의 탐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화가 자신의 말을 되새겨 보더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거창한 문제 제기라든가 자신이 추구하는 추상회화에 대한 체계화된 이론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예술에 대한 일종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로 추상미술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20세기 미술의 가장 획기적인 주요 미술사조인 동시에 거기에는 주지하다시피 여러 가지 경향, 유파, 유형 등이 있는 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 있는 경향의 하나가 바로 일반적으로 기하학적이라 불리는 추상이거니와, 그의 조형적 시도의 전체적인 문맥으로 보나 또는 작품상으로 보나 그 최초이자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는 그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미술풍토를 일찍이 향음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 경향을 대표하는 운동으로서 신조형주의(Neo-Plasticisme)와 절대주의(Suprematisme)를 꼽을 수 이는바, 하나는 수평 수직에 의한 직각적 구성과 함께 세 원색과 세 무채색(흑, 백, 회색)으로 제한된 엄격한 규제의 추상미술 또 하나는 구형, 원형, 세모꼴 및 십자형을 기본요소로 삼고 있는 추상이다. 그리고 이 두 추상운동은 또한 다 같이 입체주의미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실인즉 우리에게는 그 입체주의적 체험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 그와 같은 미술 풍토에서 유영국의 추상회화가 태어나고 또 전개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유영국의 뛰어난 예술적 직관과 확고한 조형의식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회화세계이며 실제로 그는 동세대의 화가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자신의 추상회화를 고수한 이례적인 화가이다. 그가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조형세계를 시류에 결코 영합함이 없이 일관성 있게 추구해왔다는 사실이 또한 그의 확고한 조형의지를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그러하기에 유영국의 이름과 함께 ‘외골수의 작가’ 또는 ‘외고집의 화가’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막 팔순에 접어든 노화백의 외길 화업 60년 그리고 탈속의 한 평생, 그가 남긴 발자취를 다시 새겨보는 이번 전시회는 앞서 잠깐 언급한 바 있는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초대전에 이은 두 번째 것으로 생존 작가로서는 드문 경우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여기에 전시되는 작품 중에는 특히 60년대와 70년대의 미공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또 그만큼 소중한 전시회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회의 의의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물론 아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 이른바 다원화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유영국 추상의 재조명과 아울러 한국 추상회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그 재검증이라는 데 보다 더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영국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에 있어 추상화가의 선구적 모델 케이스로서의 독보적 존재요 또한 그의 예술이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한 전형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LIST